언어의 경계에서

출제범위가 따로 없는 어학시험, 어떻게 준비할까?

coccinelle 2022. 9. 19. 15:55

 

블로그에 프랑스어와 외국어 학습에 관한 글들을 쓰느라 모아뒀던 자료들을 살펴보다가, 아주 오래전에 누군가 쓴 글을 스크랩해온 걸 발견했다. 그건 DELF B1 시험 합격수기였는데, 2016년도쯤 쓴 글인 것 같다. 첨부한 사진에 있던 문제집도 지금까지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걸 보면, 한국에선 영어 외의 언어를 공부하는 게 얼마나 힘든 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여하튼 그 글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DELF B1 시험 통과하기 위해서는 문제집 달달 외워야 한다'였다. 그리고선 덧붙이는 말이, '저는 어차피 잘 안 들리니까, 읽기 쓰기 말하기에 집중했어요'였다. 

 

 

대개 영어의 TOEFL처럼 델프 역시 정해진 범위랄 게 없다. 그래서 토플을 치려는 사람들이 으레 단어집을 사고, 문제집에서 나온 공략법을 따라하고, 후기를 읽으며 어떤 주제가 나왔고 어떤 문제가 버려도 되는 문제인지, 스피킹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지를 외워서 시험을 친다. 델프 역시 똑같은 방법으로 접근하려고들 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델프도 정해진 시험 범위란 게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시험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은 시험들은, 시중에 나온 문제집을 사서 '달달 외워야' 하는 걸까? 시험을 치르는 목적이 단지 불어불문학과 졸업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만약 유학을 목표로 하고 현지에 가서 단 몇 개월이라도 살아야 되는 사람이라면 그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이미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토익 시험 점수가 영어 능력과는 상관이 없다는 걸. 그렇다면 시험 통과는 물론이고, 프랑스어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은 뭘까?

 

 

1. 프랑스어 공인 인증 자격증 DELF DALF 시험의 구성과 특징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토플시험 준비하듯이 프랑스어 시험을 준비하는 태도는, 프랑스어 능력 시험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다. 프랑스어 시험도 토플과 마찬가지로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의 네 가지 파트로 나눠져 있고, 수준별로 A1, A2, B1, B2, C1, C2로 분류돼 있다. A1이 가장 쉽고, C2가 가장 어려운 단계라고 보면 된다. 수험자는 자기 수준에 맞는 시험을 선택해서 치를 수 있고, 각 파트별 5점 이하는 과락, 그리고 점수 총합이 50점을 넘으면 합격이다. 으레 '고득점'을 해야 하는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이 시스템을 보고 '쉬워 보인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각자 자기 감상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어 능력 시험 자체가 호락호락한 건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시험에 범위가 따로 없고, 수준이 높은 시험을 치를수록 논리력과 사고력이 요구되며, 따라서 4지선다 형태를 대충 찍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2. '문제집 외우기'로는 성공할 수 없다

 

흔히 델프 시험을 치르는 사람들 특징이, 문제집을 외우려고 하는 것이다. 델프가 다루는 주제는 광범위하고, 시험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는데 벌써 날짜는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고 수험료가 영어 시험만큼 싼 것도 아니니 공부는 해야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다. 그런 사람들은 급한 마음에 문제집에 나온 것들을 외우려고 든다. 시험에 붙고 안 붙고를 떠나, 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의미없는 공부인가. 이런 방법으로 운 좋게 통과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통과하지 못하면? 프랑스어 시험을 치러 갔다가 트라우마 생겨서 돌아오는 경우를 여럿 봤다. 프랑스어 능력시험에서 말하기 시험은 심사위원과 시사 주제로 토론을 해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 준비를 제대로 못한 사람들은 그냥 입 다물고 20여분을 멍청하게 앉아있다 나와야 하는 것이다. 바보가 된 기분 때문에 다시 생각한다. '프랑스어 시험을 치다니 아무래도 쓸데없는 일 같아'. 

 

하지만 아무리 범위가 없고 어렵다고는 해도,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범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출제되는 주제는 있기 때문이다. 문화, 프랑스어, 환경 또는 생태, 젠더, 노동과 같은 주제다. 쉽게 말하면 주로 시사 주제가 등장하고, 이 주제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은 시험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시험 문제 유형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문제집에 딸린 모의 시험만 살펴봐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제집을 달달 외우세요'가 문제 유형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면 나도 추천하는 바다. 하지만 출제되는 주제들에 대해 공부하려면? 그건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 시중에 아무리 프랑스어 교재가 없기로서니 문제집은 한국에 넥서스나 프랑스 CLE 사나 많은데 어느 것이든 사서 외우면 될까?

 

 

3. 돈과 수고를 아끼며 시험에 대비하는 방법

 

자고로 외국어를 공부하는 방법이 한 쪽에만 치우치면 당연히 언어능력은 고루 발전할 수 없다. 앞에서 예로 든 블로거처럼, 시험을 치르는데 '듣기는 어차피 잘 안 들리니까 다른 파트에 집중했다'가 하나의 전략일 수는 있다.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전략. 그러나 이건 언뜻 보기에 쉬워 보이지만 굉장히 불편하고 힘든 과정이다. 이해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데 사전에서 단어 뜻만 찾아가며 외우기만 하다 보면 금세 지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건 장기적으로 프랑스에 거주할 사람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공부법이다. 잠깐 생각해보자. 학교에 들어갔는데 듣기도 겨우 듣는 와중에 고급 언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듣고 리포트를 불어로 써서 내야 한다. 시험에 통과했으니 '그래도 나는 B1 수준이야' 하고 있을 수 있겠나? 이런 식으론 영원히 자기 자신을 미워하며 학교를 다녀야 하고, 이 때문에 학업에도 실패하는 케이스를 종종 봤다. 언어보다도 정신적인 고통 때문에.

 

이런 과정을 거치고 싶지 않다면, 그리고 유학을 준비하든 프랑스에 연수를 오든, 혹은 프랑스어권 지역에서 살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루 30분만 투자해 지난 포스팅(프랑스어 듣기 공부 사이트)에서 이야기한 RFI savoirs 사이트에서 공부하자. 이건 심지어 문제집 사는 정도의 돈도 안 든다. 다만 당신이 지금 쓰고 있는 컴퓨터와 인터넷만 된다면 가능한 것이다. 주제별, 수준별로 선택해 듣기 자료를 스크립트와 제공하고, 이에 더해 퀴즈까지 수준별로 내주는 무료 사이트는 여기가 유일하다. 시험에 자주 나오는 주제별로 분류해놨고, 각 주제별 자료 숫자를 보면 DELF나 DALF 시험에서 자주 출제되는 주제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사이트에서 공부하는 게 시험에 적중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냐고 반문하지 마라. 나는 실제로 내가 치른 시험에서 나왔던 듣기파일과 똑같은 파일을 거기서 찾은 적이 있다. 그러니 시험을 앞둔 사람이라면 하루에 30분씩, 한 개의 듣기를 듣고 스크립트 속의 어휘와 표현들을 따로 정리해 공부해보자. 주제도 매일 바꿔가며 조금씩 하다 보면 시험에서 자주 출제되는 주제로 공부한 것이기 때문에 듣기 쓰기 말하기 읽기를 따로 공부한 것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대비하는 것이 된다.

 

 

 

4. 단순 암기에서 언어능력으로 승화시키기

 

이렇게 주제별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면, 다음에 남는 시험 대비법은 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막무가내로 문제집을 외우는 것과 다르다. 시사주제 별로 공부한 다음, 거기에 나오는 어휘와 표현을 따로 노트에 모아뒀다가, 쓰기나 말하기를 위해 스스로 인출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읽기나 듣기 파트는 언어를 수용하는 시험 파트기 때문에 당장 어떤 개념이 프랑스어로 떠오르지 않아도 시험을 치르는 데는 무리가 없다. 하지만 쓰기와 말하기를 위해서는 어휘와 표현을 알아둬야 시험을 막힘 없이 치를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생태 관련 주제로 '채식을 하는 것은 환경 보호에 도움이 되는가'가 나왔다. 이 주제에 대해 쓰거나 심사위원과 토론을 행하려면 적어도 '농약', '환경오염', '생태', '종자', '농업', '산업화' 같은 단어들을 알아둬야 논지를 전개할 수 있다. 지금 당장 그런 상황을 상상해보자. 나는 이런 단어를 프랑스어로 떠올리며 논지를 전개해나갈 수 있는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면, 가장 작은 단위인 어휘와 표현들을 빠르게 머릿속에서 인출할 수 있도록 외워둬야 한다. 그러니 암기도 막무가내로 하는 게 아니다. 하나의 주제가 있고, 거기에 관련된 어휘와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결합시켜야 암기를 종합적인 언어능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암기한 것들이 흐트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남아 있으려면? 그건 누누이 말하지만, 어원 공부를 통해 어휘에 대한 지식을 확장시켜 나가는 방법밖에는 없다. 

 

옛말에 돌아가는 길이 지름길이라는 말이 있다. 시험을 앞두고는 마음이 급해서,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요령을 몰라서 무조건 뭔가를 하려고 달려든다. 당신이 불어불문학과 학생이라면 그나마 시험에 대한 정보를 얻을 데라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단지 어설프게 문제집 앞부분만 좀 공부하다 시험을 치러 가야 하는 상황이 반복될지도 모른다. 나는 사실 시험 자체에 붙고 떨어지고 하는 것보다도, 프랑스어 시험을 치러 가서 적어도 내 논지를 전개했다는 자기 만족감이 있을 때가 가장 좋았다. 말하자면 프랑스어로도 내가 가진 생각을 유감없이 피력했을 때가 가장 즐거웠다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당신이 조금이라도 이 기분을 느껴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