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경계에서

회화만 해도 먹고 사는데, 문법이나 작문은 왜 할까?

coccinelle 2022. 9. 15. 05:54

그렇다. 제목 대로다. 회화만 해도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영어도 마찬가지 아닌가. 심지어는 회화도 잘 못하지만 해외에서 5년, 7년, 많게는 10년 가까이 살았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례는 굳이 찾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건 이민 1세대 이야기고, 지금은 다르다고? 과연 그럴까? 나는 프랑스란 나라가 영어만 하는 사람들에겐 굉장히 불친절한 나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각종 행정서류 역시 당사자가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면 진척이 잘 안 된다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런 결심을 했던 건지도 모른다. 

 

'프랑스에 막 도착해서도 자유자재로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

 

그리고 그런 목표를 세우고 부단히 준비한 덕분에, 한국에서 시험 통과는 기본이고 현지인 언어교환 친구를 여럿 만들고, 대학에 곧장 진학 서류를 넣을 수 있었다. 프랑스에 도착해서는 계좌 개설, 학교 등록업무, 체류신청 등을 일사천리로 끝낼 수 있었던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언어를 구사하기 힘들면 해외 현지에 적응하고 실제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게 얼마나 지독히 어려운지를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뼈저리게 느끼고 보아왔다. 한국에서 자주 희화화 소재로 삼는 이주노동자들의 분투어린 한국 생활의 고통은, 사실상 기본적인 한국어가 안 되는 사람에게서 가장 비열하고 치사한 방식으로 가해진다. 예컨대 계약서가 무슨 내용인 줄도 모르고 사인 하라는 대로 사인을 한다거나, '안' 과 '못'을 구분 못해서 '아파서 일 못해요'라고 해야 할 걸 '아파서 일 안 해요'라고 해서 생기는 오해 등등.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다. 그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날 것 같지 않은가? 프랑스가 노동권을 중시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평등'을 지향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하는가? 이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냥 프랑스에 대한 로망이 있는 게 아니라 프랑스 뽕에 빠져있다. 한국어를 못해서 더 고생스럽게 사는 한국의 이주자들처럼, 프랑스어를 못하는 사람에게 프랑스 생활은 전혀 평탄치 못하다. 

 

 

실제로 프랑스어 과외를 하게 된 계기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프랑스 현지에서 공부하는 많은 한국인들 중에, 그러니까 나보다 몇배는 오래 살았다는 사람들 중에 프랑스어를 잘 못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걸 발견한 것이다. 단지 직장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학교에서 매번 글쓰고 읽고 토론해야 하는 학생들마저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사는 데는 크게 불편함이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너무 당연하게도, 프랑스도 자동화 시스템이 많이 도입돼서 슈퍼마켓에서도 자율계산대를 사용하고, 맥도날드는 키오스크에서, 그것도 아니면 배달앱으로 주문까지 가능하니 일상생활이 크게 불편할 건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학교나 관공서에서 오는 메일, 중요한 문서 작성 같은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라고, 그리고 전화통화는 아직도 불편하다고, 그렇게들 말하는 것이 아닌가. 관공서, 은행, 사회보장제도 기관등과 소통을 해야 하는 일은 프랑스에서 살면 필수다. 주택보조금을 신청하거나 은행에 계좌 개설을 요청하거나, 공문서를 발행해야 할 때엔 대개 예약을 잡아야 하고, 그런 것들을 하려면 상황에 맞는 어휘와 문법, 그리고 포맷에 맞는 양식으로 편지를 써야 하는 일이 자주 생긴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내가 원하는 일이 진척은 커녕 진도 하나 나가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 뿐인가. '회화만 해도 일상생활엔 지장 없다'는 태도는 자칫하면 사회적인 소외감과 도태를 불러와 우울증까지 불러온다. 나는 실제로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고, 그들의 공통점은 대개 어학연수로 프랑스에 무작정 왔고, 적당한 수준의 일상 회화는 가능하게 되었지만 고급 단계의 독해력이나 문장력은 떨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렇게 되면 대학 이상의 강의나 세미나, 그리고 직장에서 토론은 자연히 한계가 생기게 되고, 이건 자존감 하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언어 문제를 갖고 있는 이들은 대개 한국인만 만나거나, 친구가 있어도 프랑스어 영어를 섞어가며 간신히 대화하고, 그렇지 않으면 한국어를 유창히 구사할 줄 아는, 그러니까 프랑스 국민 중 1%도 채 안 되는 사람들을 만나려고들 한다. 그건 사실 현지에서 사는 생활이라기보다, 견디는 것에 가깝다. 상상 한 번 해보라. 아침에 눈 떠서 카톡으로 가족이나 한국에서 연락오는 몇 안 되는 친구들과 소통하고, 학교나 일터에서 동료나 친구와 말 한 마디 안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일과가 끝나면 슈퍼에 가서 말 한마디 않고 자율계산대로 물건을 계산하고 나온다. 여가 시간을 보낼 친구도, 크고 작은 행사나 축제에 같이 갈 친구도 없다. 그런 삶을 살다보면 자연히 우울하게 되고, 그건 정말이지 자신의 건강에도, 그리고 장기적으로 자신의 세계관에도 큰 악영향을 끼친다.

 

 

짐작컨대 그런 삶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희망을 갖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자 하고, 부푼 기대를 가지고 새로운 장소로 간다. 당연하게도 새로운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가 다 좋은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그들과 소통하려는 나의 작은 노력들이 하나씩 모여 자연스러운 언어와 표현으로 드러날 때, 타인도 좀 더 쉽게 나를 받아들일 수 있다. 프랑스어라는 장벽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면, 그 후 부터는 내가 존재하는 아름다운 시간도, 행복한 순간도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한 번 쯤 생각해보길 바란다. 단지 최소요건인 DELF나 DALF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당신의 목표가 아니라, 왜 보다 높은 수준으로 언어를 배우는 게 목표가 되어야 하는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