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법을 이해해야 회화든 작문이든, 혹은 독해든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매번 했었다. 한동안 실용적인 회화를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비판때문에 문법을 일선 학교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던 적이 있지만, 어쩐지 최근에는 조금씩 문법의 중요성을 조금씩 다시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단어를 수만개 외우고, 유려한 회화를 하려고 구동사를 외워가며 '원어민처럼 말하기'를 아무리 노력한다해도, 결국 언어의 본질은 단순히 그런 각각의 단어나 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의 배열을 결정짓는 문법
그렇다면 '언어의 본질'이란 어디에 있는가? 각각의 명사, 동사를 많이 알면 당연히 들리는 단어도 많아지니 회화도 잘 될 것이고, 책 읽기도 수월해지는 것 아닌가?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나의 긴 문장 속 모든 단어의 뜻을 알아도 해석이 안 되는 경험. 우스갯소리로 이런 상황을 많이들 예로 들지 않는가. 생각해보자.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걸까? 맥락을 이해 못하고 각각의 단어를 사전에서 잘못 찾아서? 그럴 수도 있다. 전체적인 맥락이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서 한 문장만 가지고 정확한 텍스트 이해와 번역은 힘든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대략 맥락에 맞는 단어들을 찾아 넣었는데도 이해가 안 된다면? 이때 대부분의 학습자들이 피로를 느끼고 포기하려 한다. 단어를 하나씩 찾는 데만해도 시간을 많이 썼는데, 그러고도 이해가 되지 않으니 답답하고 지루해지는 것이다. '이 수많은 단어를 외워야 하다니, 불가능해' , '시간없어' 같은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 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자. 언어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배열'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 바로 문법이다.
한국어와 영어의 기본적인 차이, '어순'
'배열'이라고 썼지만 달리 말하면 이건 어순이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쓰는 한국어를 살펴보자. 우리말은 조사를 붙여서 말을 잇는다. 다음의 예를 보자.
- 친구와 나는 함께 학교에 간다.
여기서 조사를 붉은 색으로 표시해보면,
- 친구와 나는 함께 학교에 간다.
우리는 이렇듯 조사를 붙인 채로, 말의 순서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 나는 친구와 함께 학교에 간다.
- 학교에, 친구와 나는 함께 간다.
- 간다, 친구와 나는 학교에.
하지만 영어나 프랑스어는 조사를 사용하지 않고, 어순의 적합한 배열을 통해 문장을 만든다. 같은 내용을 영어와 프랑스어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 I go to school with my friend.
- Je vais à l'école avec mon ami.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순서를 바꾸려고 하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띄엄띄엄 단어만 이해해도 원어민은 알아듣기는 할 테지만, 이를 두고 결코 '문장'이라고 하진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런 걸 하기 위해 영어를, 프랑스어를 공부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것도 그렇게 오랜 시간, 많은 노력을 들여서 말이다.
5형식을 줄줄 외워도 직독직해가 안 되는 이유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5형식이 뭔지도 알고, 어순이 서양어, 특히 영어나 프랑스어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은 아는데 왜 직독직해가 잘 안 되는 건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독해 연습을 해야 하는가? 미안하지만 5형식을 외우고 있다는 사실이 곧장 직독직해의 열쇠가 되는 건 아니다.아마 여기까지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그런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원서나 신문을 읽다가 긴 문장을 만나면 일단 긴장하는 사람. 그리고 아마도, 짐작컨대, 당신은 긴 문장을 만나면 외운 5형식을 떠올려가며 주어를 찾고, 동사를 찾고, 진땀을 빼며 앞뒤로 눈을 돌리다 결국 '대충' 이해하고 넘어갈 것이다. '내가 번역자도 아니고 이 정도 이해했으면 됐어'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내심 불편할 것이다. 원서를 읽는 이유가 뭔가? 훌륭한 번역자도 많고, 심지어 구글 번역도 이렇게나 잘 되는 시절에. 당신은 그나마 원서로 쓰인 글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니라 직접, 스스로 '진짜'인 언어를 확인하고, 표현의 풍부함을 느끼고 싶었던 것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매번 긴 문장을 만날 때마다 '대충' 넘어가려 한다면 원서를 읽느니 차라리 잘 번역된 글을 읽는 게 백번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보어를 이해하자
이쯤에서, 영어 구문론의 바이블로 통하는 류진의 『구문도해 영어구문론』을 살펴보자. 그는 책을 시작하는 서론 "구문의 기본원리"에서 놀랍게도 가장 첫번째로 '보어'를 언급한다.
보어는 말 그대로 보충해 주는 언어이다. 영어에 있어서 보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영어의 뼈대가 보인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
영어는 말하고자 하는 대상 주위에 수 없이 많은 보어가 형성되어 있고, 덩어리로 뭉쳐서 굴러다니는 보어를 생선에서 살 발라내듯 골라내면 영어의 구조는 엄청 간단하게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여기, '말의 덩어리'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외국어 이해의 핵심 비법이다. 앞서 말한 '말의 덩어리'란, 의미가 형성되는 말들의 뭉침을 가리킨다. 이를 간단히 이해하기 위해 다음 문장을 보자.
- 성격이 좋고 학생들에게 친절한 선생님은 항상 미소를 짓는다.
의미가 담긴 단어들을 연결지어 색깔을 칠해 구분해보면, 단어가 몇개 사용됐든 상관없이, 문장이 4개의 의미 단위로 구성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류진이 말한 것처럼, 문장이란, 말하고자 하는 대상 주위에 많은 형용사, 부사 등과 같은 것들을 붙여 보어를 형성하는데, 이 의미단위들을 읽어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직독직해가 가능해진다. 생각해보면 한국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엔 의미단위로 호흡을 맞춰가며 읽지 않는가. 나열된 단어들이 무엇을 수식하고 무엇을 풀어주는지, 그리고 그것이 문장 내에서 어떤 의미단위를 형성하는지만 읽어내면, 직독직해는 끝난 것이나 다름 없다. 단어나 구동사를 많이 외우는 게 영어의 핵심이 아니다.
어휘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어휘를 많이 알수록 외국어를 하는데에 막힘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곰곰이 한 번 생각해보자. 문장을 이루는 기본은 무엇인가? 무엇이 단어들의 나열을 어떤 '의미'로 만들어 주는가? 나는 어떻게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었는가? 당신이 붙들고 있는 그 문장 하나는, 당신이 이런 생각을 거듭한 끝에야 순순히 자신이 가진 의미를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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