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경계에서

외국어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자책이 든다면

coccinelle 2022. 10. 6. 05:08

 

토플시험도 마찬가지지만 프랑스어 시험도 듣기 시험을 제일 먼저 친다. 듣기, 읽기, 쓰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하기 순서로 치르는데, 듣기에서 잘 못 들었다고 생각이 들 경우 대부분 불안감 때문에 다른 문제들 역시 망치는 경우가 있다. 수능으로 치면 영어듣기 같은 거라, 듣기에서 '이미 망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시험에 집중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노력할수록 심해지는 자기비난

이건 시험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언어학자들은 언어 능력 중에서도 가장 성취하기 어려운 분야가 쓰기라고들 하지만, 외국어를 배우는 외국인 입장에서는 좀 다르다. 쓰기보다는 듣기가 아무래도 가장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도 대학수업이나 강의는 좀 나은 편이다. 주제와 내용을 미리 준비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회화는 대화의 주제와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화제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예컨대 어제 먹은 점심 이야기를 하다가 음식점 주인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 음식 맛 이야기를 하다가 예전에 갔던 여행지에서 먹었던 비슷한 음식과 비교를 한다. 아무리 대화 내용의 맥락을 이해했다고 한들, 매번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다보면, 지친다. 게다가 친구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해야 될 때, 상대방이 '아니 내말은 그게 아니라' 혹은 '아까 말했잖아'같은 말을 듣게 되면, 나중에는 스스로를 비난하기 쉽다.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못 듣는 거지.'

 

 

처음에는 집중력을 탓해보기도 하고, 연습도 해본다. 뉴스를 영어로 또는 불어로 듣기, 영화나 넷플릭스 시리즈 자막 없이 보기, 단어 외우기, 영화 대본 외우기, 듣고 따라하기 등등. 대부분의 책에서 하라는대로 좋다는 방법은 다 강구하고, 일과표를 작성해 작심삼일일지라도 열심히 하는데도, 실력은 늘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그럴 땐 또 다시 스스로를 비난한다. 난 외국어엔 젬병인가봐... 라면서. 

 

 

외국어 대화 스킬, 열린 마음

그런데 사실, 저렇게 하는 것들이 당연히 도움은 되지만, 외국어에 있어서, 특히 외국어 듣기를 할 때 가장 필요한 건 무엇보다 '열린 마음'이다. 여기서 열린 마음이란, 단지 즐겁게 대화에 임하는 것 뿐이다. 안 들리는데 어떻게 대화에 임하냐고? 이런 질문을 하는 당신은 아마도 프랑스어로, 혹은 영어로 하는 대화를 '듣기 시험'과 같이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진력을 다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본래 대화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상대방의 말을 듣고, 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적절한 반응을 하고, 적절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각보다 한국사람들이 한국인들끼리의 대화에도 말을 경청하려는 자세가 별로 없는데, 외국어를 할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상대방이 앞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못 알아듣겠어, 무슨 단어지'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자. 내가 편안한 친구와 대화하고 있을 땐 그런식으로 대화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잘못 알아듣는 경우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라고 하고, 상대방 말이 너무 빠르면 '천천히 말해줘' 요청할 수 있다. 여기에는 언어의 차이가 없다. 한국어로 대화하든, 영어로 하든, 혹은 프랑스어든, 그냥 대화에 임하는 자세란 그런 것이다. 상대방이 한 말을 잘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하는 것, 뜻을 물어보는 것, 혹은 어떤 어려운 단어를 들으면 한 번 더 물어보는 것,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기를 부탁하는 것 등. 대화의 스킬이란, 사실 다른 게 아니다. 이처럼 대화 자체에 임하는 것이다.

 

시험의 듣기도 마찬가지다. 시험에서 듣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자신의 의식적인 흐름을 한 번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잘 들리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알아듣는 단어보다는 못 알아들은 어려운 단어에 집중하고, 그러다보면 맥락을 놓치고 어려운 단어 하나, 구 하나에 매달려 결국 전체의 흐름을 놓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나는 못 듣는다는 그런 두려움 때문에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에 집중한 게 아니라, 오히려 못 알아듣는 것에 더 집중한 것은 아닌가? 

 

 

오해는 이해의 과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 흐름은 사실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당신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사실 외국어학습에선 언어를 배우는 가장 주된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데에 매달리지는 말아야한다. 단어에 주목할 게 아니라 문장을, 그리고 문장을 넘어선 주제와 테마에 좀 더 초점을 맞추는 듣기 연습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모르는 단어의 뜻은 유추하게 되고, 맥락과 상황을 연결지어 이해에 다다르게 된다.

 

언어의 오해는, 모국어냐 외국어냐의 차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어떤 말을 하는 상대방의 의도를 맥락을 몰라서 놓치는 수도 있고, 맥락을 알더라도 의도를 잘못 짚어서 놓치는 경우도 있다. 모든 언어는 그러므로 오해의 기반 위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항상 잘못 이해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 언어인 것이다. 이런 간단한 진리를 이해하면 언어를 대할 때 마음을 열 수 있다. 항상 주눅들고, 이해하지 못해서 불안해하고, 스스로가 바보인 것 같다고 자책하는, 그런 걸 멈추자. 그리고 단지 한 번 부탁하자. '미안하지만 이해 못했어. 한 번 더 설명해줄래?'  이 말 한마디면 된다.